※[문제있슈]는 대중문화 콘텐츠 속 문제적 장면을 다루는 코너입니다. 혹시 이 장면을 보며 마음 한 편이 불편하거나 화가 치밀지 않으셨나요?
“집 앞에서 (택시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어떤 지나가던 남자랑 눈이 마주친 거야. 근데 그 남자가 분명히 이리로(내 집방향과 다른 쪽으로) 갔거든. 분명히 가는 걸 확인하고 골목으로 이렇게(집 방향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이 남자가 이렇게(나를 따라) 오는 거야. 그 순간에 주변을 봤는데 아무도 없어, 골목에. … 약간 ‘이상한데?’ 하면서 골목으로 꺾었는데, 내가 오해하면 미안하쟎아.”
“아주 좋은 자세야, 아주 좋은.”
지난 20일 방영된 JTBC <아는형님>의 한 장면입니다. 이날 <아는형님>에는 <스트릿 우먼 파이터> 리더들이 출연했는데요, 크루 홀리뱅의 리더 허니제이가 과거 골목에서 괴한을 만난 경험을 털어놨습니다. 허니제이는 어두운 밤 귀갓길에 남성이 자신을 따라온다고 느꼈다고 말하면서, 혹시나 남성이 자신이 가던 길을 가는 것이었는데 오해하는 것일까 우려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MC 중 한 명인 김희철씨가 허니제이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아주 좋은 자세”라며 칭찬을 했습니다.
허니제이가 자신을 뒤쫓아 오는 남성이 사실은 자신을 해할 의도가 없을 수도 있다고 검열하며 대처를 망설이는 것이 대체 누구에게 ‘좋은 자세’인 걸까요? 허니제이 본인은 아닐 겁니다. ‘혹시 저 남성은 제 갈 길을 가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남성을 먼저 보내려 가방에서 열쇠를 찾는 척 멈춰 선 허니제이에게 돌아온 것은 남성의 습격이었습니다. 허니제이가 ‘기분 탓일까’ 망설이는 사이 남성은 그 틈을 타 허니제이의 입을 막고 몸을 결박했습니다.
허니제이의 망설임을 ‘좋은 자세’라고 느끼는 것은 허니제이가 아닌, 허니제이의 뒤를 따라오던 사람에 감정을 이입한 결과입니다. 심지어 김희철씨는 허니제이를 뒤따라 오던 남성이 곧 허니제이를 습격할 가해자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허니제이가 ‘나를 공격한 괴한에게 반격한 사건을 자세히 말해주겠다’고 한 뒤 한창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김희철씨는 자신 앞에서 당시 불안에 떨었던 경험을 털어놓는 피해자보다 이야기 속에서 뒤를 쫓아오던 가해 남성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봤습니다.
방송 직후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김희철씨의 발언을 비판하는 반응이 이어졌습니다. 누리꾼들은 “요즘 젊은 남자들 생각을 대변하는 것 같아 소름끼친다. 여자들이 생사람을 잡고 다닌다고 생각하니까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도 저렇게 반응하는 것” “생사람 잡을까봐 여성들이 자기검열하다가 그 사이에 죽는 수가 있는데 (너무하다)” 등의 게시물을 올렸습니다. 해당 발언이 담겨 있는 네이버 영상 클립에도 이를 지적하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한번도 저런 위험을, 공포를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충분히 의심스러운 상황이었고 경계심을 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좋은 자세? 남자들 기분 나쁘지 말라고 강도라도 당해야 하나” 등의 댓글이 다수의 공감을 얻었습니다.
김희철씨의 발언은 무고한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여기는 여성들의 태도는 ‘좋지 않다’고 여기는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모든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몰아가지 말라”는 얘기는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들이 익히 들어온 주문입니다. 그러나 여성들은 일상 속 많은 상황에 위험을 느낍니다. 낯선 이와 단 둘이 엘리베이터를 탈 때, 공중화장실에 갈 때, 집의 창문을 열 때, 지하철에서 옆 사람과 몸이 닿을 때 등…. 때와 장소에 따라 그 정도는 다르지만 불법촬영부터 성폭력, 일면식 없는 사람의 폭행까지 다양한 경우를 우려합니다. 위험을 느끼면 방어 태세를 갖춰야 합니다. 무방비로 당할 수는 없으니까요. 위험을 피할 방도를 찾는 것을 ‘상대방을 잠재적 가해자로 몰아가는 것’으로 여기고 비난한다면, 여성들은 어떻게 자신을 지켜야 할까요.
이후 이수근씨의 발언은 점입가경입니다. 허니제이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남성으로부터 벗어납니다. 허니제이의 가방을 훔쳐 도망친 남성을 따라가 가방을 되찾기까지 합니다. 용감하게 대처해 다행히 상황을 벗어난 허니제이도 사태가 종료된 뒤 길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웁니다. 허니제이는 “당시에 만나던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매일매일 집 안까지 데려다 줬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라고 말합니다. 또다른 MC 이수근씨는 “명분이 생겼네, 그 친구도”라며 농담합니다. 허니제이가 더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던 사건을, 남자친구가 매일 허니제이의 집을 방문할 수 있게 된 계기 정도로 가볍게 여긴 발언입니다. 허니제이는 사건 이후 집으로 가는 길을 다시는 마음 편히 혼자 걸을 수 없게 됐습니다. 이수근씨는 당사자의 공포에 공감하지도, 사건의 무게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 ‘남자친구는 좋았겠다’며 허니제이의 경험을 농담 거리로 삼았습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시종일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포기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시청자들은 여성 대상 범죄를 더이상 가볍게 다루지 말 것, 피해자 입장을 고려할 것을 미디어에 요구하고 있습니다. 불법촬영물을 ‘야동’으로 표현하거나 스토킹 범죄에 대해 ‘사랑해서 그런 것’이라며 가해자에게 감정을 이입하면 뉴스, 예능을 가리지 않고 비난받습니다.
여성의 의사에 반하여 집까지 쫓아간 남성이 여성은 물론 가족까지 살해한 사건이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 적어도 여성이 실존하는 공포를 얘기할 때 ‘상상 속 무고한 남성’이나 ‘여자친구의 집에 가고 싶은 남자친구’에 감정을 이입하는 식의 반응은 피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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