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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춘추] 페르미 문제 - 매일경제


엄청난 섬광의 광기(光氣)가 가시자 거대한 버섯구름이 관측소 사람들의 시선을 압도했다. 곧 굉음과 충격파가 그곳을 덮칠 것이다. 잠시 후 어떤 사람이 뭔가 실험하듯이 종이 몇 장을 머리 높이에서 슬쩍 떨어뜨렸다. 바로 그때 충격파에 관측소가 흔들리고 아래로 떨어지던 종이도 휙 하고 옆으로 날아간다. 그 상황에서도 아까 종이를 떨군 사람은 혼자서 뭔가 계산하고 있다. '충격파에 종이가 2.5m 날아갔군. 그러면 폭탄은….'

1945년 7월 16일 새벽에 있었던 인류 최초 핵폭탄 실험에 참관하면서 종이가 날아간 거리를 기초로 폭탄의 위력을 대충 계산해보던 사람은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 20세기 위대한 물리학자 중 하나로 최초로 원자로를 만들어 핵분열을 성공시킨 사람이다. 일반인들에게 그는 '어림짐작 계산'으로 푸는 이른바 페르미 문제의 출제자로 알려져 있다.

그가 제시한 문제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미국 시카고에는 피아노 조율사가 몇 명 있는가"이다. 페르미 문제는 기존의 과학 지식과 통계를 활용하고 몇 가지 전제를 붙이면 정답은 아니라도 그럴듯하게 정답 비슷하게 추측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조율사 문제를 접한 학생들은 30명에서 100명까지 다양한 답을 제시했다고 한다. 시카고 인구, 피아노 조율 주기 등이 계산에 등장한다. 실제로 페르미는 복잡한 물리학 계산에서도 '초벌'로 답을 궁리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페르미 문제'는 머리 식히는 심심풀이가 아니었다.

이런 문제 풀이를 '합리적 추측(educated guess)'이라고 한다. 합리적 추측은 여러 측면에서 유용하다. 우선 어렵게 답을 구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해서 논리적인 사고를 하게 만든다.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요인이 무엇인가 고민하게도 한다. 더욱이 중요한 통계나 상수(常數)를 잊지 않게끔 하는 효과도 있다. 그리고 특히 중요한 것은 합리적 추측을 하려는 의지와 이것을 잘하는 능력은 어느 조직이든 고위층에게 아주 필요한 덕목이라는 점이다.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경영 환경에서 의사결정을 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경쟁자는 답이 없는데 나는 '정답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다면 절반은 이긴 셈이다. 예컨대 국채시장에서 상반기에 외국인이 30조원을 순매수했는데 앞으로 원화 약세가 되면 어찌 되겠는가 하고 합리적 추측을 한다면 채권형 펀드 운용에 도움이 되는 식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각 분야 전문가 중에도 합리적 추측을 잘하는 사람이 흔치 않은 듯하다. '추측'하는 능력이 부족하거나 '추측'은 전문가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전문가의 추측에서 때로는 큰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나저나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당시 시카고의 전화번호부에는 피아노 조율사가 81명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최초 핵폭탄의 위력은 TNT 20킬로톤(㏏)이었다.

[조홍래 한국투자신탁운용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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