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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은 공과 같이 놓고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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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피해자에 연대하는 사람들
“한번 안아보자” “손잡자” 만연한 직장 내 성희롱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피해자에게 연대의 뜻을 밝힌 메시지들. <한겨레> 젠더데스크의 트위터 계정에 올라온 메시지를 메모지에 옮겼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피해자에게 연대의 뜻을 밝힌 메시지들. <한겨레> 젠더데스크의 트위터 계정에 올라온 메시지를 메모지에 옮겼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서울시장 비서로 일하면서 위력(힘)에 따른 성희롱·성추행으로 고통받았다고 호소하는 피해자에게서 ‘나’를 보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4년이나 참았다가 왜 이제 말하냐’ ‘결정적 한 방을 내놓으라’며 피해자에게 비난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차이는 왜 발생하는 것일까. 여러 요인 중 하나는 성차별, 성적 괴롭힘을 인지하는 민감성(성인지 감수성)이 성별·세대별로 다르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겨레21>이 설문조사업체 ‘오픈서베이’에 의뢰해 7월22일 전국 20~59살 남녀 500명에게 한 ‘직장 내 성평등 인식 조사' 결과를 보면, “외모에 대한 칭찬도 직장 내 성적 괴롭힘이 될 수 있다”는 질문에 20대 여성 37.1%가 ‘매우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나 50대 남성은 3.2%에 그쳤다. “업무 외 사적인 메시지 전송은 성적 괴롭힘이 될 수 있다”는 항목에서도 20대 여성 38.7%가 ‘매우 그렇다’고 했지만, 50대 남성은 14.5%에 그쳤다. 성인지 감수성의 격차가 큰데도 성희롱·성폭력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는 심판자를 자처해 ‘나는 옳은 판단이 가능하다’고 착각한다. 이런 착각은 2차 가해로 이어질 수 있다. _편집자주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우리 남성에게 ‘좋았던 옛날’은 어쩔 수 없이 흘러가고 있다. 세상은 바뀌고 있는 것이다. (중략) 직장을 물밀듯이 부비고 들어오는 오늘의 젊은 세대들은 더 이상 복종과 체념, 묵인의 미덕 속에 감금당해 있으려 하지 않는다. 시몬드 드 보봐르가 이미 설파하였듯이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월간 <말> 1993년 11월호) 1993~98년 ‘서울대 성희롱 사건’을 변론하며 ‘직장 내 성희롱’에 유죄판결을 최초로 받아냈던 박원순 변호사의 낙관대로, 그동안 여성들은 일터에서 성희롱·성차별과 끊임없이 싸워왔고 조금씩 이겨왔다. 그렇게 오랜 시간 여성들이 안전하고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길에 함께해온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기에, 그의 죽음과 마주한 여성들은 더 분노한다. 그와 함께 모두의 인간다운 삶을 지지했던 남성도 깊게 절망한다. 이들이 박 전 시장의 ‘성희롱·성추행 의혹’과 극단적 선택을 평가하는 데는 성인지 감수성의 차이, 세대 효과, 진영 따위의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이들은 박 전 시장이 아닌 피해자를 먼저 떠올린다. 이번 사건에서 ‘박원순’을 지우면, 여성 직원을 “복종과 체념, 묵인”에 가두고 “좋았던 옛날” 남성의 시절로 퇴행했던 가해자만 남으므로. _______
피해자가 어릴수록, 여성 비율이 낮을수록
여성들은 피해자 모습에서 나를 본다. 박 전 시장 사건은 위력에 따른 성희롱, 성추행으로 고통받았던 트라우마를 여성에게 다시 일깨우는 순간으로 다가온다. 30대 전지혜(가명)씨는 박 전 시장이 ‘집무실 안 내실로 피해자를 불러 안아달라’(7월13일 기자회견)고 했다는 말에 “몇 년 전 회사 팀장과 노래방에 갔을 때 ‘손 한번 잡아보자’ ‘한번 안아보자’며 느끼하게 웃었던 유부남 팀장이 생각나 기분이 더러웠다”고 했다. 4년간의 성추행으로 피해자 인생이 바뀐 것처럼, 그날 일로 지혜씨 삶도 달라졌다. “진로를 고민했는데, 그날 회사에 대한 맘이 완전히 떠버려 퇴사했어요. (이후) 같은 팀 어린 여직원도 갑자기 관뒀다고 들었는데, 팀장한테 같은 피해를 보지 않았을까 싶어요.” 피해는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20대 국회 비서 마은정(가명)씨에겐 피해자의 참담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피해자가 상사의 속옷을 치우고 혈압을 재며 낮잠을 깨워야 했던 행위는 “단순 직장 갑질이 아니라 여성 비서라는 이유로 성별 역할을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강요한 명백한 성희롱”이지만 “그도 지시가 떨어지면 ‘안 하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 이해한다. 짐작이 아니라 과학이다. ‘어릴수록, 학력이 높을수록, 조직 내 차별이 심할수록, 여성 비율이 낮을수록 성희롱 피해가 증가한다’(2018년 ‘직장 내 성희롱 예방정책의 효과성’)는 통계를 볼 때, ‘20대 여성 비서’는 성희롱에 가장 취약한 대상이다. 특히 직업공무원인 피해자와 달리, 비정규직인 은정씨는 채용·해고·인사평가 권한을 쥔 인사권자의 위력을 더 강력하게 느낀다. 의원들이 “여자는 손이 예뻐야 한다. 얼굴보다 손이다. 여자가 손을 주면 다 준 것이다”라거나 “(정치인의 성폭력 사건은) 정치인들이 인간의 욕구를 다 해소할 여유도, 시간도 없어 벌어진 것”이라 모멸감을 줘도 즉각 항변하기 어렵다. 남성 보좌진도 은정씨가 회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하면 “여자 없이 남자들만 무슨 맛으로 술을 먹냐” 하고, 뒤늦게 회식에 가면 의원 양쪽 옆자리를 비워둔다. 2018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을 폭로한 김지은씨 ‘미투’ 이후 달라진 게 있다면 “너랑은 해외 출장 못 가겠다”며 업무에서 배제한 ‘펜스룰’(남성이 성폭력에 관련되는 일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여성과 거리를 두는 일)뿐이었다. _______
“‘증거 공개해라’ 2차 가해에 분노”
여성들이 직장에서 느끼는 위력은, 박 전 시장 사건의 피해자나 은정씨처럼 인사권자에게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직장 내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와 관련한 다른 노동자, 고객 등 업무 관련자도 여성을 압박하거나 위축시키곤 한다. 30대 직장인 원이영(가명)씨는 20대 신입사원 시절에 “회사 선배” “40대 남성”이란 사실만으로도 위압을 느꼈다. 그래서 어느 회식 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인사 정도 하는 다른 팀 선배”가 잠시 밖으로 나온 자신을 뒤따라와 “우리 같이 손잡고 걸을까?”라고 했을 때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하고 어색하게 웃어넘겨버렸다. 그 불쾌한 기억이 흐려질 무렵, 이영씨는 동료에게 스토킹도 당했다. 방송사 기자인 30대 안서진(가명)씨는 “열 살 이상 차이 나는 유부남 경찰관”인 취재원에게서 전화와 문자로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다. “취재원으로 잘 지내려 하긴 했으나 그렇게 친하지는 않던 취재원”의 일방적인 고백에 서진씨는 일에 대한 회의감마저 들었다. 박 전 시장의 극단적 선택은 성희롱·성추행 의혹만큼 여성들에게 폭력적 행위로 각인된다. “인간적인 사과를 받고 싶었다”는 피해자의 바람이 끝내 외면당했다는 사실이 30대 국진영(가명)씨는 가장 마음이 아프다. “박원순은 인권변호사로 일하며 피해자를 법률적으로 어떻게 지원할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는데, 가해자가 되니까 피해자가 말을 못하게 한 거잖아요.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이 종결되도록 법을 이용한 것에 큰 배신을 느껴요.” 그도 신문사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20대 시절, 40대 기자로부터 성희롱과 성차별을 당하고도 “거지 같은 사과”만 받은 ‘거지 같은 기억’에 아직도 화가 치민다고 했다. “하루는 둘이 있을 때 그 사람이 ‘나는 내 다리에 여자 다리를 걸쳐놓지 않으면 잠을 못 잔다’고 하더라고요. 근무 마지막 날에는 그가 남성 인턴들한테는 명함을 주며 “기자 되면 연락하라” 하면서도 여성 인턴들에게는 명함을 안 줬어요. ‘여자는 기자 되기 어렵다’고요. 항의했더니 그래요.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라고.” 사람들이 피해자에게 ‘한 방의 증거를 내라’거나 ‘피해자가 아니라 피해 호소인이다’라는 2차 가해 발언을 하는 것에도 진영씨는 “피해를 회복할 길이 없는 여성의 고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행위라며 분노한다. “명망 있는 나이 든 남성과 젊은 여성이 대치하는 지점에서 이번에도 남성의 말에만 무게를 싣는 거잖아요. 여성을 같은 인간으로 안 보는 거죠.”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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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10명 중 8명은 그냥 참았다
성폭력은 젠더 문제이면서 노동 문제다. 정신병원에서 일하는 50대 간호사 박민영(가명)씨는 올해 원무과장에게서 “56살이 아직도 생리하냐” “×××× 팔아 쉬려고 하냐”는 모욕을 당했다. 그전부터 민영씨는 병원의 부조리에 문제제기를 했다는 이유로 직원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거나 전보 조처되는 ‘직장 내 괴롭힘’을 받아왔는데, 그날은 생리휴가를 냈다는 이유로 성적 괴롭힘까지 당한 것이다. 이전에도 병원 직원에게서 “아직도 몸매가 괜찮다” “목이 가늘고 예쁘다”는 말을 듣고 수치를 느꼈으나, ‘생리’를 들먹이는 폭언에는 “삶이 무너져내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나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싸워온 민영씨도 성적 괴롭힘에 대해선 아직 공론화를 고민하고 있다. 피해를 구제하고 피해자를 보호할 법적 의무가 있는 회사에 성희롱 피해 사실을 알리기 주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성가족부의 ‘2018년 성희롱 실태조사’를 보면 피해자 10명 중 8명은 참고 넘어갔다. 그중 절반은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서’(49.7%)였으나 ‘행위자와 사이가 불편해질까봐서’(30.2%), ‘소문·평판이 두려워서’(12.7%)처럼 2차 피해를 우려하는 경우도 많았다. 실제 2차 피해를 준 가해자는 상급자(39.6%)보다 동료(57.1%)가 더 많았다. 30대 홍다민(가명)씨는 신입사원 시절 남성 선배로부터 “껴안고 수차례 엉덩이를 만지는” 피해를 당한 뒤 여성 선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박 전 시장 사건 피해자의 호소를 묵살한 다른 비서실 직원들처럼, 여성 선배는 침묵을 강요했다. “그런 이야기 해봤자 앞으로 너 회사 생활하기만 힘들어져. 나도 다 겪은 일이니 조용히 넘어가는 게 좋을 거야.” 결국 다민씨는 회사에 피해 사실을 알렸고, 여성 선배의 경고대로 “늦은 시간까지 왜 술을 마셨어” 같은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_______
군대, 사회 초년 시절 떠올리는 남성들도 “공감”
피해자 편에 서는 남성도 많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에서) 특이하게도 직장생활을 하는 사회 초년생 남성들이 (피해자) 김지은의 입장을 이해했다”(<미투의 정치학>)는 여성학자 정희진의 분석대로, 남성들의 연대도 대개 ‘경험’에 기반을 둔다. 피해자와 비슷한 시기, 다른 지방자치단체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20대 남성 석현(가명)씨는 피해자가 신체 접촉 장소로 지목한 ‘집무실 안 내실, 즉 침실’에서 “군대 있을 때 매일 아침과 밤, 선임과 단둘이 근무하던 초소”를 떠올렸다. “그곳에선 아무리 선임이 나에게 쌍욕을 하고 폭행해도 내가 직접 고발하지 않으면 아무도 피해 사실을 알 수 없다는 고립감이 컸어요. 내가 남자라고 해도 피해자처럼 시장 침실에 혼자 들어가 낮잠을 깨우는 일은 압박감이 심할 것 같아요.” 군대에서의 위력 체험 외에 페미니즘 학습, 같은 공무원인 여성 팀장의 불쾌한 신체 접촉, 아내와의 지속적인 대화도 현이씨가 피해자 마음을 들여다보게 해준다. “나도 권력에 피해를 봤지만 나한테 소중한 사람의 고통을 들으면 그 사람의 고통이 내 것처럼 느껴져요.” 50대 남성 나민수(가명)씨는 상당수 또래 586세대와 달리 박 전 시장이 아닌 피해자의 고통을 먼저 헤아린다. 오래 노동운동을 하며 “노동 존중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확립하지 않는다면 (일터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은 위력과 위계에 의한 직장 내 괴롭힘, 성적 괴롭힘”이라는 경험과 원칙을 쌓아온 덕분이다. 당연히 ‘박원순의 공과 과를 함께 평가하자’는 또래들의 주장도 받아들일 수 없다. “공과 과는, 공적인 영역에서 다뤄져야 할 문제예요. (성희롱·성추행은) 그가 쌓아온 공과 같이 놓고 볼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는 그냥 공적인 지위를 가지고 사적 욕망을 채운 거예요.”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은정씨는 세월호 참사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겪으며 ‘우리 사회가 더 좋아지게 하기 위해 뭐라도 해보자’는 마음에 국회에 들어가 비서가 됐다. “정치인이 좋은 정치를 하도록 열심히 보좌하는 것이 우리 사회를 위한 일”이라 믿고 최선을 다해 일했으나 지금은 “의원에 대한 존경심과 일상적인 성희롱·성차별 사이”에서 꿈과 현실의 괴리를 느낀다. “피해자도 직장에서 처음 일하면서 더 좋은 정치, 더 좋은 사회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노력했을 거예요. 열정과 재능도 있었겠죠. 그런데 한때 존경했을 정치인한테 그런 고통을 당했을 때 얼마나 혼자 참았을까요. (이후) 조직에 계속 인사이동을 요청해도 안 받아들여졌을 때 그 안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그런 생각만 하면 너무 마음이 아파요.”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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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8, 2020 at 02:35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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